이 영상은 민음사 회원문학팀 편집자 박혜진 씨를 초대해 “고전문학 스타터팩”을 소개하는 대담이다. 고전이 반드시 어렵고 낡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 자체로 즐거움이 배가되는 작품 4권을 선별해 추천한다. 투르겐예프 『사냥꾼의 스케치』, 강신제 『젊은 느티나무』, 다자이 오사무 『쓰가루』, 셰익스피어 『리어왕』이 핵심 도서이며, 대화 후반에는 박혜진 편집자의 개인적 성장사와 민음사에서 일하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 고전에 대한 일반적 오해: 어렵다, 지루하다, 낡았다, 재미없다.
- 박혜진 편집자는 고전을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담고 있으면서도 작가만의 특수한 색깔로 그려낸 작품”으로 이해한다.
- “5천 년 전에도 애새끼는 아빠 말을 안 들었다”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경험을, 특정한 시공간과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고전의 힘.
- 러시아나 중국 같은 대륙 작가들이 강점인 “개괄(概撈)”의 힘: 넓은 땅과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자라 무수한 케이스를 압축해 ‘미니어처’처럼 보여준다.
책별 소개
1. 『사냥꾼의 스케치』 — 이반 투르겐예프 (Ivan Turgenev)
-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문호로 꼽히는 작가.
- 농노제 폐지 이전 러시아 시골 풍경과 지주, 농노, 마부, 노래꾼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사냥꾼 화자가 만나며 그린 연작 단편집.
-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좋고, 중간부터 읽어도 무방한 구조.
추천 편: 「노래꾼들」
- 술집에서 벌어지는 두 노래꾼의 노래 대결을 글로써 재현한 작품.
- 한쪽은 동네에서 노래 제일 잘한다는 23살 청년(야코프), 다른 쪽은 직업이 도급업자인 외지인.
- 두 노래 스타일은 예술의 양대 축을 보여준다:
- 외지인: 화려한 기교, 성량, 관중을 압도하는 퍼포먼스.
- 야코프: 처음에는 떨리지만, 점차 러시아인의 진실하고 뜨거운 영혼을 드러내는 숨 막히는 진정성.
- 관중의 반응 묘사가 핵심: 발을 구르고 욕을 섞어 환호하는 장면과, 노래가 끝난 뒤 아무도 말을 못 하는 침묵의 장면이 교차된다.
- 이 단편은 “창작의 두 극단”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며, 캠퍼들이 즐기는 만화 『스바루』의 발레 장면처럼 예술의 극단을 글로 옮긴 작품으로 비유된다.
2. 『젊은 느티나무』 — 강신제
- 한국 고전 단편집. 강신제는 “이상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당시의 기대를 깨는 인물들을 다룬다.
-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는 첫 문장으로 유명한 작품.
- 주인공은 18살 여고생으로, 어머니의 재혼으로 생긴 의붓오빠(현규)를 사모한다.
핵심 장면
- 오빠가 방에 들어와 간식을 달라고 하거나, 이름을 반으로 줄여 “숙”이라고 부르는 등 사소한 접촉에 여주인공의 감정이 꿀렁거린다.
- 오빠 친구의 연애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오빠가 알게 되자, 오빠는 분노하며 뺨을 때리고 방을 나간다.
- 여주인공은 그 반응이 자신에 대한 질투임을 깨닫고 황홀감에 빠진다.
- 이야기가 여자아이 시점에서 쓰여 있기 때문에 금기적이지만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심리를 솔직하게 즐길 수 있다.
- 캠퍼들이 좋아하는 비주류 감성과 문장의 맛이 살아 있는 한국 고전으로 추천.
3. 『쓰가루』 — 다자이 오사무 (Dazai Osamu)
-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 쓰가루를 다녀온 기행 소설. 일본에 “다자이 오사무 검정”이 있을 정도로 애호가들이 꼽는 근본 작품.
- 도쿄 생활에 지쳐 있고, 한 번도 자신을 도쿄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다자이가 쓰가루로 돌아가 세 사람을 만난다:
- 닭장에서 일하던 소년
- 동네 절친
-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던 하녀 다케(다해)
핵심 에피소드
- 친구와의 재회: 도쿄 사람이 된 자신의 언어를 의식하며 편지를 썼지만, 친구 집에 가니 사과주가 드럼통으로 준비되고 꽃게가 넘쳐난다. 이 과잉 환대 속에서 “나는 사실 도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과 “쓰가루 인의 애정 표현은 원액이기 때문에 물로 희석하지 않으면 버겁다”는 통찰이 나온다.
- 다케와의 재회: 8살 때 갑자기 사라진 하녀 다케를 30대 중반에 찾아간다. 운동장에서 마주한 재회는 극적이지 않고, 마치 오랜 가족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듯이 조용하다. 그 순간 다자이는 “달콤한 방심”을 느낀다. 생모 옆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한 편안함.
- 부끄러움의 근원: 다자이의 문학 핵심은 “부끄러움”인데, 그 이유가 이 책에 있다. 닭장 소년, 다케, 친구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피고용자였고, 그들을 고용한 부모의 돈은 고리대금으로 벌어든 것이었다. 선택하지 않은 모순에서 오는 부끄러움.
4. 『리어왕』 —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 박혜진 편집자가 『사냥꾼의 스케치』 해설에서 “우리는 이 슬픈 시간의 무게에 복종해야 합니다. 해야 할 말고 느낀 것을 말합시다”라는 문장을 보고 다시 읽게 된 작품.
- 리어왕은 세 딸에게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요구하며 지참금을 나누겠다고 한다.
- 첫째·둘째 딸은 화려한 수사로 사랑을 고백하고, 막내 코델리아는 “Nothing(없습니다)”이라고 답한다.
- 코델리아는 경쟁적인 사랑 고백 구도에 들어가기 싫고, 자신이 느낀 것을 진실하게 말할 뿐.
- 리어왕은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 코델리아는 “느낀 것을 말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 박혜진은 자신이 리어왕형(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잘함), 남편과 동료 민경은 코델리아형(진실성에 무게)이라고 비유하며, 친밀한 관계에서 말하기 양식이 다르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딜레마를 설명한다.
편집자 박혜진의 삶과 직업관
첫 만남과 책에 대한 열정
- 처음 이종범 작가의 강연에 방청했고, 대학생 시절 프레젠테이션 동아리에서 연사로 초대한 인연이 시작.
- 고등학생 때 매년 3월 1일 청소년 문학상에 응모했으나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 어느 날 조용하고 존재감 없던 남학생 동창이 수상하는 모습을 보고 “문장이 사람을 어퍼컷 날릴 수 있다”는 충격을 받음.
- 대학에서는 복수전공, 독일 유학, PT 동아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문학에 몰입.
20대 우울과 회복
- 20세부터 25세까지 가장 깊은 우울의 시기를 보냄. 매일 울던 적도 있었다.
- 네이버 일러스트를 보고 “내 마음의 자화상”을 발견했다고 느낄 만큼 고통스러웠다.
- 의학적 도움과 배우자를 만나면서 안정을 찾았고, 남편을 통해 처음으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감정 표현을 배움.
- 30대 초반 출산 이후 산후우울증이 다시 찾아왔지만, 20대보다 나은 상태로 극복.
민음사 입사 초기와 권명원
- 입사 초반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극도로 느낌. 팀원들이 모두 책돌이·책순이였고, 작가·교수들과 일하면서 수치심과 열등감을 경험.
- 3~4년간 “이 직업이 맞는가”를 방황하며, 권명원이라는 서당에서 1년간 공부함.
- 서당에서 엄청난 동료들과 비교되며 건포도가 될 정도로 쪼그라들었지만, “내가 듣는 것에 만족하자”는 마음으로 버틴 경험이 후에 큰 힘이 됨.
- 수치심과 열등감을 겪은 경험이 편집자로서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낌.
출판과 모순
- 민음사는 사익을 추구하는 회사이면서도, 돈이 되지 않아도 대한민국에 있어야 할 책은 출판하는 모순적 존재.
- 박혜진은 “돈을 좋아하지만 정작 돈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재미로 결정할 때가 많다”는 자신의 모순과 회사의 모순이 닮았다고 느낌.
- 주식 투자 에피소드: 커피 브랜드 ‘1,2 커피’를 착각해 ‘1,2’라는 다이어트 신약 회사 주식을 샀는데, 유일한 흑자 종목이 되었다는 일화.
핵심 인용
- “5천 년 전에도 애새끼는 아빠 말을 안 들었다.”
- “해야 할 말고 느낀 것을 말합시다.” (『리어왕』)
- “고향이라는 건 달콤한 방심을 주는 곳이지.”
- “쓰가루 인의 애정 표현은 약간 물로 희석해서 복용하지 않으면 타지역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 “그 오빠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걸. / 나는 깨달았다. 오빠 이름이 현규거든요. 현규가 그처럼 자기를 잃은 까닭을.” (『젊은 느티나무』)
느낀 점과 실행 포인트
- 고전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압축해 보여주는 거울이다.
- 일부 작품은 영상이 아닌 글로 읽어야 문장의 맛과 깊이가 배가된다.
- 친구, 동료, 연인 사이에서 “해야 할 말”과 “느낀 것을 말하는 것” 사이의 딜레마를 인정하고, 서로의 말하기 양식을 존중하는 것이 관계의 깊이를 만든다.
- 자신의 취약함을 나누는 것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핵심이다.
- 문학을 직업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과 작품을 끊임없이 연결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