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L: https://www.youtube.com/watch?v=vPUCrPZ-ffA
채널: 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원본 게시일: 2021-12-05 · 영상 길이: 33분 43초
전사: 한국어 음성을 로컬 음성인식으로 전사한 뒤, ASR 오인식(즉자/대자·현상학·우연성 등)을 철학 문맥에 맞춰 교정했다.
읽기 범위: 이 영상은 『존재와 무』 1편이다. 핵심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존재론, 즉 세계의 존재 방식과 인간 의식의 구조다. 제목에는 헤겔·후설·하이데거가 모두 들어가 있지만, 실제 본편에서 설명하는 철학자는 헤겔과 후설이며 하이데거의 개념은 전개되지 않는다. ‘대타자/타자의 시선’과 자기기만도 다음 편에서 다룰 주제로 예고만 한다.
📌 핵심 질문과 한 문장 논지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의식은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만나는가? 사르트르의 답을 영상은 이렇게 풀어낸다. 사물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 의식은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며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선다. 의식에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으므로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야 하고, 그 자유는 해방인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부담이다.
- 사르트르는 세계의 존재자를 의식이 없는 **즉자(卽自)**와 의식하는 **대자(對自)**로 구분한다.
- 두 존재 양식의 근본에는 신의 목적에 따른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비필연성)**이 있다.
- 후설에게서 받아들인 지향성을 통해 의식이 대상을 향한다는 점은 수용하지만, 순수 의식을 고정된 실체처럼 이해하는 것은 비판한다.
- 살아 있는 의식은 자신을 완전히 대상화할 수 없다. 의식은 대상과 자기 자신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 파악을 넘어서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1. 왜 『존재와 무』를 존재론으로 읽어야 하는가
1.1. 사르트르의 삶과 철학을 둘러싼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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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삶과 분리하지 않은 지식인
- 강연자는 사르트르를 문학에도 재능이 있고, 시대의 정치적 위기에도 참여한 지식인으로 소개한다. 사르트르는 1964년 『말(Les Mots)』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거부했다.
- 시몬 드 보부아르와 맺은 비전통적 관계, 프랑스 레지스탕스 참여, 베트남전 반전운동도 언급한다. 강연의 요지는 사르트르의 사유가 현실과 동떨어진 지적 유희가 아니라 실천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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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문장만 떼어 쓰는 문제
-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같은 문장을 맥락 없이 인용해 우울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선택의 기로에서 무조건 결단하라는 인생 지침처럼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한다.
- 이런 독법은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분석을 생략한다. 강연은 그의 문장을 멋진 격언으로 소비하기 전에 『존재와 무』가 인간과 존재를 어떤 구조로 설명하는지 먼저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1.2. 1943년이라는 시대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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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흔든 인간관
- 『존재와 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3년에 출간됐다. 제1·2차 세계대전의 대량 살상은 이성적 인간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역사를 계속 발전시킨다는 믿음을 흔들었다.
- 신이 창조한 아름답고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전쟁과 대학살을 겪은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사르트르에게 시대가 다시 던진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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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가 아닌 존재론
- 책의 부제는 **『현상학적 존재론 시론』**이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지, 그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를 묻는다.
- 카메라는 생각이나 의지 없이 놓여 있지만 촬영자는 생각하고 의지를 가진 채 앉아 있다. 두 대상은 모두 존재하지만 존재 방식이 다르다. 존재론은 겉모습만 묘사하는 대신 이런 차이와 근거를 묻는다.
- 사르트르는 이런 존재의 차이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분석한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바로 처방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존재 구조를 밝히려는 책이다.
2. 세계의 두 존재 양식: 즉자와 대자
2.1. 즉자존재(en-soi, being-in-itself)
- 그 자체로 있는 사물
- 길 위의 돌이나 카메라처럼 의식이 없고,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거나 판단하지 않는 존재다.
- 돌은 무게·크기·단단함 같은 성질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성질을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의식이 돌을 바라보고 파악할 때 그것은 의식의 대상이 된다.
- ‘즉자’는 ‘그 자체로 있음’을 가리킨다. 사람을 즉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살아 있는 의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특징만 가진 사물처럼 다루는 경우를 뜻할 수도 있다.
2.2. 대자존재(pour-soi, being-for-itself)
-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인간
- 돌의 무게나 크기를 보고 있는 사람처럼 의식을 가진 존재다. 대자는 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 즉 대상과의 관계 속에 있다.
- 대자는 이미 완성된 물건처럼 자기 자신과 일치해 있지 않다.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아직 아닌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 따라서 즉자/대자는 몸과 영혼을 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세계 안에서 ‘의식 없는 사물’과 ‘의식하며 대상을 향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 다르다는 구분이다.
2.3. 두 존재 양식의 공통점: 우연성(contingency)
- 존재는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 강연은 즉자와 대자 모두가 우연히 존재하게 됐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제시한다. 인간도 돌도 신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존재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된 것이다.
-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관점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에 목적을 부여하는 창조자가 전제되지 않는다. 강연자는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난 일, 시청자가 각자 태어난 장소도 스스로 선택한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예를 든다.
- 여기서 우연성은 ‘아무 원인도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그 존재가 애초부터 반드시 있어야 할 본질·목적에 의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3. 현상학: 선입견을 괄호 치고 나타남을 보기
3.1. 현상학적 환원과 판단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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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진 관점부터 잠시 멈춘다
- 과학자는 꽃을 과학적 관점에서, 예술가는 예술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둘은 꽃을 보기 전부터 서로 다른 선이해를 가지고 접근한다.
- 영상이 설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이런 선이해와 ‘세계는 당연히 이렇게 존재한다’는 자연적 믿음에 괄호를 쳐 판단을 유보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세계가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익숙한 전제를 잠시 당연시하지 않고 경험에 무엇이 나타나는지 살피는 태도다.
- 환원 뒤에 드러나는 경험과 의식의 작용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현상학의 기본 방향이라고 강연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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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취한 것과 비판한 것
- 사르트르는 후설의 현상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독일에서 그 사상을 공부했다. 특히 의식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향한다는 **지향성(intentionality)**을 자기 존재론의 방법에 가져온다.
- 그러나 환원 뒤에 남는 순수 의식을 안정된 내면의 실체나 고정된 ‘나’로 이해하는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강연에서 사르트르의 비판은 “그 순수 의식을 사물처럼 고정하면 살아 있는 의식의 움직임을 놓친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3.2. 지향성과 의식의 초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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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좋아하는 가수, 먹고 싶은 음식, 오전에 만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의식은 내용 없는 통처럼 가만히 있기보다 늘 무엇인가를 향한다.
- 그 대상은 실제로 눈앞에 있는 사물일 수도, 기억이나 상상 속 대상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의식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자기 바깥의 대상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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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성은 의식이 자기 밖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 강연에서 ‘초월’은 종교적·초자연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다. 의식이 자기 내부에 머물지 않고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작용을 말한다.
- 대상을 포착하는 동시에 의식은 지금 자신이 보고 찾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의식한다. 의식은 세계를 향함과 자기 자신을 전반적으로 알아차림을 함께 수행한다.
4. 반성적 의식과 전반성적 의식
4.1. 반성적·정립적 의식: 대상을 앞에 세우고 판단하기
- 피에르의 카페 찾기
- 사르트르의 예에서 피에르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며 주변을 살핀다. 눈앞의 사람들을 보고 “이 사람은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다”, “저 사람은 머리색이나 눈매가 다르다”라고 비교한다.
- 의식이 세계의 많은 대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자기 앞에 세우고, 그것이 무엇인지 규정·비교·판단하는 작용을 영상은 반성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반성은 도덕적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이 아니라, 대상을 살핀 의식이 되돌아와 판단한다는 의미다.
- 대상에 성질과 범주를 부여해 “이것은 잉크병이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포착하는 것을 정립적(positional/thetic) 태도라고 설명한다.
4.2. 전반성적·비정립적 의식: 내가 경험하고 있음을 살아서 알아차리기
- 반성 이전에 이미 작동하는 자기 알아차림
- 피에르가 상대를 찾고 정보를 비교하는 동안, 그가 자신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매번 별도의 대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그 행위는 자기에게 주어져 있다.
- 이런 배경적이고 비대상적인 자기 알아차림을 **전반성적 의식(pre-reflective consciousness)**이라고 한다. 반성적 의식보다 앞서 있으며, 반성적 의식이 가능하도록 받쳐 주는 순수 의식이다.
- 전반성적 의식은 ‘나’를 하나의 물건처럼 앞에 세워 분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정립적(non-positional)**이다. 이는 의식이 전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4.3. 대상화가 만드는 고정과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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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가능성을 한 가지 이미지로 굳힌다
- 살아 있는 사람은 변화하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자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분석할 때는 특정 외모·성격·과거의 행동을 근거로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 분석하려면 대상을 잠시 멈춰 놓아야 하므로, 살아 움직이는 대자를 고정된 즉자처럼 취급하게 된다. 이때 그 사람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판단은 그 사람의 전체를 그대로 포착한 것이 아니라 일부를 고정해 만든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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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도 대상화한다
-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성격·직업·과거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내가 규정한 나는 분석 가능한 대상, 곧 즉자처럼 굳어진다.
- 하지만 그 규정을 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의식은 그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 반성적 자기인식은 ‘대상으로서의 나’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 대상을 바라보며 넘어서는 주체적 의식 전체를 붙잡지는 못한다.
- 강연은 이를 의식의 응고화라고 부른다. 계속 흐르고 대상을 향하는 의식을 물이 굳듯 고정된 자기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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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와 당근의 비유
- 당나귀가 당근을 향해 한 걸음 가면 당근도 그만큼 앞으로 움직여 거리를 유지한다는 비유가 나온다.
- 마찬가지로 의식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붙잡으려 할 때 붙잡힌 ‘나’는 대상화된 이미지가 되고, 그 이미지를 붙잡는 살아 있는 의식은 다시 그 바깥에 남는다. 그래서 순수 의식으로서의 자기는 자기 자신을 완전한 사물처럼 포착할 수 없다.
- 이 불가능성이 인간 의식의 불행 또는 긴장을 만든다.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해의 결과가 곧 자신의 전체는 아니다.
5. 헤겔을 거쳐 설명되는 ‘순수 존재’와 ‘무’
5.1. 규정이 없으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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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가 대상을 알아보게 한다
- 영상은 책상 두 개의 크기를 비교하는 예를 든다. 크기는 관계와 양으로 설명할 수 있고, 딱딱함 같은 성질도 사물을 규정하는 범주가 된다.
- 우리가 어떤 대상을 설명할 때는 관계·양·성질처럼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규정이 쓰인다. 아무 규정도 부여할 수 없다면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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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순수 존재와 순수 무’
- 강연은 헤겔 『논리학』의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같다”는 논리를 끌어온다. 어떤 성질·관계·범주도 붙지 않은 ‘순수 존재’는 아무런 구체적 내용을 말해 주지 못하므로 공허한 무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 이 연결은 사물들이 실제로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아무 규정도 없는 순수 상태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파악할 내용을 갖지 않는다는 논리다.
5.2. 사르트르의 순수 의식은 왜 ‘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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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성적 의식은 아직 특정 대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 반성적 의식은 대상을 정립하고 크기·성질·관계 같은 규정을 붙인다. 반대로 전반성적 순수 의식은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규정하기 전의 비정립적 의식이다.
- 영상은 이 의식이 고정된 내용이나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무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은 존재하지만 사물처럼 특정 성질에 갇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 순수 의식은 텅 빈 실체가 마음속에 들어 있다는 말도 아니다. 대상을 향하고 스스로를 넘어서는 활동이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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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과 사르트르의 차이
- 강연의 설명에서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 뒤에 남는 순수 의식의 중요성을 세우지만, 사르트르는 그것을 고정된 ‘순수한 나’로 세우면 의식이 이미 대상처럼 굳어졌다고 비판한다.
- 사르트르가 붙드는 것은 의식이 사물처럼 자기 안에 가득 찬 실체가 아니라,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규정을 넘어서는 빈자리·열림이라는 점이다. 그 빈자리 때문에 의식은 대상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6. 무화작용, 시간, 자유
6.1. 무화작용(néantisation): 의식이 구별하고 부정하는 일
- 무는 사물을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 피에르는 카페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구별한다. 의식은 주어진 대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찾는 대상과 아닌 대상을 나누고 부재·차이를 드러낸다.
- 강연은 무인 의식이 자기 바깥을 향해 나아가 대상들을 구별하는 일을 무화작용이라고 부른다. 물질을 없애는 마술이 아니라, 세계에 ‘아님’, ‘아직 아님’,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의식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된다.
- 인간은 바로 이처럼 주어진 것과 거리를 만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다.
6.2. 시간: 현재의 살아 있는 의식과 되돌아본 과거·미래
- 강연이 제시하는 단순화된 구분
- 영상은 대자적 존재가 살아서 활동하는 현재를 자기 시간으로 살며, 과거와 미래는 반성적 의식이 대상으로 붙잡아 규정할 때 즉자처럼 굳어진다고 설명한다.
- 지나간 나를 “그때의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고정하면 과거는 현재의 살아 있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끝난 이미지가 된다. 미래도 계획·기대·걱정의 대상으로 붙잡힐 때 지금의 의식 앞에 놓인 대상이 된다.
- 이는 강연이 핵심 개념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제시한 설명이다. 사르트르의 시간론 전체를 “인간은 현재만 산다”는 한 문장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6.3. 자유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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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보다 먼저 존재하는 인간
- 돌은 돌의 성질로 규정되지만, 인간 의식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의미·목적·성격으로 고정돼 있지 않다. 인간은 먼저 우연히 존재하고, 그 뒤 선택과 행위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만들어 간다.
- 이것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의 이 영상 속 뜻이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본질은 그 뒤의 삶에서 형성된다.
- 자신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의한 결과는 하나의 자기 이미지일 뿐, 그 정의를 넘어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의식 전체를 대신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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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조건
- 의식은 고정된 본질이 없고 대상을 향해 자신을 넘어설 수 있으므로 자유롭다. 이 자유는 누군가가 허락해 주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 의식의 존재 방식에서 나온다.
-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말이 나온다. 사람은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태도와 행동을 취하며, 선택의 책임을 완전히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수 없다.
- 이 자유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환경의 제약이 없다는 낙관론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응답할지를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며, 강연은 이를 피곤하고 무겁고 때로는 피하고 싶은 숙명으로 강조한다.
7. 강의가 예고만 한 다음 논점
7.1. 자기기만과 대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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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기만(bad faith)
- 강연은 본질 없는 의식의 자유가 낳는 부작용을 설명할 때 사르트르의 자기기만 개념이 등장한다고 예고한다.
- 하지만 이 편에서는 자기기만의 사례나 논증을 실제로 해설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기만을 이미 다룬 내용처럼 덧붙이지 않고, 다음 논의의 예고로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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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자/타자의 시선과 다음 편
- 강연은 다음 편에서 대타자에 관한 사르트르의 논의를 다루겠다고 한다. 라캉을 비롯한 이후의 사상가들이 타자 담론을 전개하는 데 사르트르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와, 분석철학자 에릭 매튜스 등이 이 부분을 황당하다고 비판한다는 평가를 함께 소개한다.
- 이 편에서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어떻게 대상으로 만드는지, 대타자 관계에서 갈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논증은 아직 전개되지 않는다.
7.2. 제목과 실제 강의 범위
- 영상 제목에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가 적혀 있으나 음성 전사 전체에서 하이데거의 개념 설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헤겔은 순수 존재/순수 무의 논리로,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과 지향성의 배경으로 다뤄진다.
- 이 편은 사르트르의 타자론까지 완결하는 강의가 아니다. 존재론적 토대를 놓고 끝나며, 대타자 담론은 다음 강의로 넘어간다.
논증의 전체 흐름
전쟁 이후 인간이란 무엇인가? → 존재론은 존재 방식의 차이를 묻는다 → 세계에는 즉자와 대자가 있다 → 둘 다 우연히 존재한다 → 현상학은 선이해를 괄호 치고 나타남을 기술한다 →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를 향한다 → 대상을 규정하는 반성적 의식과 그 행위를 배경에서 아는 전반성적 의식 → 자기/타인을 대상으로 고정하면 살아 있는 의식을 놓친다 → 전반성적 의식은 규정이 없으므로 무 → 의식은 무화작용으로 대상을 구별하고 자신을 넘어선다 →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롭고, 그 자유로 자기 삶을 만들어야 한다.
핵심 요약 (20줄)
-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1943년 전쟁 중 출간된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 강연은 이 책을 인생 처방전보다 인간과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분석으로 읽는다.
-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의 기원뿐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 묻는다.
- 사르트르는 의식 없는 사물인 즉자와 의식하는 인간인 대자를 구분한다.
- 즉자는 돌처럼 그 자체로 있고, 스스로를 생각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 대자는 대상을 향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의식적 존재다.
- 강연은 두 존재 양식 모두 신의 계획에 따른 필연이 아니라 우연성을 공유한다고 설명한다.
- 현상학적 환원은 과학적·예술적 선이해와 자연적 태도를 괄호 치는 방법이다.
- 사르트르는 후설에게서 의식의 지향성을 받아들인다.
- 지향성은 의식이 늘 어떤 대상·기억·가능성을 향한다는 뜻이다.
- 초월성은 의식이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 반성적 의식은 대상을 앞에 세우고 비교·판단·규정한다.
- 전반성적 의식은 내가 경험하고 있다는 비대상적 자기 알아차림이다.
- 대상화는 타인과 자기 자신을 고정된 사물처럼 만들어 가능성을 가린다.
- 당나귀와 당근의 비유처럼, 자기를 대상으로 붙잡으면 붙잡는 의식은 다시 바깥에 남는다.
- 영상은 헤겔의 순수 존재=순수 무 논리를 통해 무규정적 순수 의식을 설명한다.
- 사르트르의 ‘무’는 의식의 부재라기보다 고정 본질이 없는 의식의 열림을 가리킨다.
- 무화작용은 대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아님’을 드러내는 의식의 활동이다.
- 본질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으므로 실존이 본질에 앞서고, 인간은 선택으로 자신을 형성한다.
- 자유는 해방인 동시에 책임의 부담이며, 자기기만과 대타자 논의는 다음 편의 주제다.
